※ 원문 읽기: https://omn.kr/1u4xi
[편집자말] 2021 제22회 서울퀴어문화축제 기간 중에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인들이 소수자, 인권, 평등에 대한 감각, 차별, 대항표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칩니다. 불빛을 따라 자신만의 노트를 써가고 있는 문화·예술인 6인의 글을 릴레이 기고 "불빛과 노트들"을 통해 소개합니다. |
"다 좋은데 더럽지 않게 잘 그려야 해요."
2015년도 한 예술대학의 그림책 창작 실습 시간 중, 강사에게 직접 들었던 말이다. 엄마가 둘인, 혹은 아빠가 둘인 아이들이 앞으로 한국에도 생길 테니 그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고 발표한 직후의 일이었다.
발표를 하면서도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 말을 들으면 어떡하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알아차리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당황한 채 '이 이야기의 어디가 더럽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질문했을 때 강사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답했다. 물론 그것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는 않았다.
이후 빗발치는 학우들의 원성으로 인해 그 강사는 다음 수업 시간에 내게 사과했다. 내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라고 말할 용기도 없어서 '내가 아니라 사회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지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말로 두루뭉술한 사과를 건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사과한다고 되는 일인가? 내가 용서하면 지나가는 그런 종류의 일인가? 저런 사람이 저명한 아동문학 번역가로, 작가로, 대학의 강사로 버젓이 앉아있는데 성소수자 어린이들은 무엇을 읽고 자란다는 건가. 사과를 받고 오히려 마음이 더 참담해졌다.
그러나 내 마음이 참담하다고 해서 퀴어 그림책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바빴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했고 졸업한 후에는 회사도 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그림책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그림책을 만들겠다고 진심으로 다짐한 것은 그 후로도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퀴어혐오' 시위에 따라나온 어린이가 퀴어라면?
▲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
ⓒ 권우성
2018년 서울 퀴어문화축제에서 친구들을 만나 놀다가 물을 사러 들어간 편의점에서 한 어린이를 보았다. 부모에게 끌려 반대 세력 시위에 참여한 어린이였을 것이다. 그 애는 엄마가 계산을 끝낸 음료를 낚아채다시피 들고 단숨에 비웠다. 양 볼이 새빨갰다. 음료를 마시는 걸 멈추지 않은 채 코로 숨을 쌕쌕 내쉬었다.
저 애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무지개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을까. 만약 저 애가 퀴어라면, 자라서 자신이 퀴어임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받아들일 여유도 없이, 괜찮다며 안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자란다면. 얼마나 더 많은 어린이들이 그렇게 자랄까. 생각에 잠긴 사이 그 애는 다시 엄마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한 권의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인해, 그 그림책을 덮은 후 어린이가 짓는 표정으로 인해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창작자가 되는 일에는 어떤 작품에 대한 경외가 필요하니까. 그러나 퀴어 창작자들은, 싸워야 하는 창작자들은 조금 다르다. 나는 어떤 강사의 혐오로 인해, 음료수를 한 번에 마시던 어린이의 새빨간 두 볼로 인해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심한 후에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가 좋아할 것이라 짐작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이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할 것. 어린이의 가능성을 잘못이라 말하는 어른들에게 소리치는 그림책을 만들 것. 부끄럽지 않은 세상을 어린이에게 전해줄 것.
▲ 그림책 <고민이 자라는 밤>
ⓒ 김나율
적고 나니 무척이나 당연해서 보잘것없어지는 원칙들이었다.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금 상기시켜야 하는 일들. 내 첫 번째 퀴어 그림책인 <고민이 자라는 밤>은 당연한 이야기를 그럼에도 계속하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책은 물론 더럽지 않았다.
닐 게이먼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동화가 진실 그 이상인 까닭은 용이 존재한다고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다. 용을 무찌를 수 있다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퀴어 그림책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세상이 길러낸 용을 무찌를 수 있는 용기를 믿고 있다. 이 믿음이 누군가에게 한 자루의 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나율 : 그림책 <고민이 자라는 밤>, <원의 마을> 쓰고 그림. 디즈니랜드에서 프로포즈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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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말]
2021 제22회 서울퀴어문화축제 기간 중에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인들이 소수자, 인권, 평등에 대한 감각, 차별, 대항표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칩니다. 불빛을 따라 자신만의 노트를 써가고 있는 문화·예술인 6인의 글을 릴레이 기고 "불빛과 노트들"을 통해 소개합니다.
"다 좋은데 더럽지 않게 잘 그려야 해요."
2015년도 한 예술대학의 그림책 창작 실습 시간 중, 강사에게 직접 들었던 말이다. 엄마가 둘인, 혹은 아빠가 둘인 아이들이 앞으로 한국에도 생길 테니 그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고 발표한 직후의 일이었다.
발표를 하면서도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 말을 들으면 어떡하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알아차리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당황한 채 '이 이야기의 어디가 더럽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질문했을 때 강사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답했다. 물론 그것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는 않았다.
이후 빗발치는 학우들의 원성으로 인해 그 강사는 다음 수업 시간에 내게 사과했다. 내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라고 말할 용기도 없어서 '내가 아니라 사회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지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말로 두루뭉술한 사과를 건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사과한다고 되는 일인가? 내가 용서하면 지나가는 그런 종류의 일인가? 저런 사람이 저명한 아동문학 번역가로, 작가로, 대학의 강사로 버젓이 앉아있는데 성소수자 어린이들은 무엇을 읽고 자란다는 건가. 사과를 받고 오히려 마음이 더 참담해졌다.
그러나 내 마음이 참담하다고 해서 퀴어 그림책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바빴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했고 졸업한 후에는 회사도 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그림책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그림책을 만들겠다고 진심으로 다짐한 것은 그 후로도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퀴어혐오' 시위에 따라나온 어린이가 퀴어라면?
▲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
ⓒ 권우성
2018년 서울 퀴어문화축제에서 친구들을 만나 놀다가 물을 사러 들어간 편의점에서 한 어린이를 보았다. 부모에게 끌려 반대 세력 시위에 참여한 어린이였을 것이다. 그 애는 엄마가 계산을 끝낸 음료를 낚아채다시피 들고 단숨에 비웠다. 양 볼이 새빨갰다. 음료를 마시는 걸 멈추지 않은 채 코로 숨을 쌕쌕 내쉬었다.
저 애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무지개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을까. 만약 저 애가 퀴어라면, 자라서 자신이 퀴어임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받아들일 여유도 없이, 괜찮다며 안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자란다면. 얼마나 더 많은 어린이들이 그렇게 자랄까. 생각에 잠긴 사이 그 애는 다시 엄마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한 권의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인해, 그 그림책을 덮은 후 어린이가 짓는 표정으로 인해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창작자가 되는 일에는 어떤 작품에 대한 경외가 필요하니까. 그러나 퀴어 창작자들은, 싸워야 하는 창작자들은 조금 다르다. 나는 어떤 강사의 혐오로 인해, 음료수를 한 번에 마시던 어린이의 새빨간 두 볼로 인해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심한 후에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가 좋아할 것이라 짐작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이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할 것. 어린이의 가능성을 잘못이라 말하는 어른들에게 소리치는 그림책을 만들 것. 부끄럽지 않은 세상을 어린이에게 전해줄 것.
▲ 그림책 <고민이 자라는 밤>
ⓒ 김나율
적고 나니 무척이나 당연해서 보잘것없어지는 원칙들이었다.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금 상기시켜야 하는 일들. 내 첫 번째 퀴어 그림책인 <고민이 자라는 밤>은 당연한 이야기를 그럼에도 계속하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책은 물론 더럽지 않았다.
닐 게이먼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동화가 진실 그 이상인 까닭은 용이 존재한다고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다. 용을 무찌를 수 있다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퀴어 그림책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세상이 길러낸 용을 무찌를 수 있는 용기를 믿고 있다. 이 믿음이 누군가에게 한 자루의 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나율 : 그림책 <고민이 자라는 밤>, <원의 마을> 쓰고 그림. 디즈니랜드에서 프로포즈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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